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 (문단 편집) == 계승과 파치 가문, 교황청과의 대립 ==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해 1463년부터 일을 담당해 나폴리 페란테 왕의 차남인 페데리고를 만나기 위해 피사로 가거나 페데리고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 이폴리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들렀다. 1466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2세]]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톨파의 [[명반]] 광산 계약에 대해 토의했다. 인문학 교육을 받느라 경영 수업을 소홀히 해 로마 은행의 지점장인 삼촌 [[조반니 토르나부오니]]와 은행 업무에 대해 토론했으며, 아버지 피에로와 다양한 경험을 쌓은 외교관에게 보내는 수준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1466년 8월에 아버지 피에로가 병에 걸려 카레지에 간 틈을 이용해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언덕당이 베네치아와 페라라에 원조를 요청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를 벌였다. 아버지 피에로의 지시에 따라 피렌체로 가서 도착 준비를 했는데, 언덕당의 일원 디오티살비 네로니의 형인 대주교의 별장 근처에서 언덕당의 무장하는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이들이 로렌초를 알아차리지 못해 무사히 지나가 아버지 피에로에게 외딴 길로 오라는 전언을 보냈다. 아버지 피에로가 피렌체로 와 반대파인 언덕당을 추방시킨 이후 1468년에 피렌체 가문간에 결혼을 한다는 전통을 깨 로마 출신으로 오르시니 가문의 상속녀인 클라리체와의 결혼을 성사했다. 동생인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함께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자들과 지적인 취향을 가진 상인들과 함께 인간의 최고 소명, 아에네이드의 철학적 교의에 대해 토론했다. 아버지인 피에로 사후 1469년에 계승해 2월에 로렌초는 결혼에 대한 피렌체인들의 반감들을 달래기 위해 1만 두캇이나 들여 마상 대회를 열었다가 6월에 클라리체가 도착하자 결혼했으며, 유산을 상속받은 몇 년 간은 경기, 행진, 음악, 축제 등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1471년에 [[교황]] [[식스토 4세]]가 선출되자 피렌체인들의 축하 인사들을 보냈으며, 교황이 볼로냐와 포를리 사이의 작은 마을인 이몰라를 구입하기 위해 4만 두캇을 조달하라는 요청을 받자 로렌초도 전략적인 요충지인 이몰라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여러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 결국 파치 가에서 교황의 요구에 응했으며, 교황이 피렌체의 전초 기지인 시타 디 카스텔로에서 니콜로 비텔리를 퇴거시키려고 하자 6천 명을 모집하여 원조했지만 결국 비텔리는 항복했다. 1472년에 자치 도시 볼테라에서 인근 동굴의 명반 광산 계약에 대한 분쟁이 일어나 볼테라인들이 중재를 요청하자 광산 통제권은 조합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했다.그러나 폭동이 일어나자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시도했다. 볼테라에서 이에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선동자들을 추방했지만 불온한 움직임을 내지 못하도록 용병대를 볼테라에 보내어 1달 만에 볼테라를 함락시켰다. 용병대가 볼테라를 마구 약탈하자 볼테라로 직접 가서 병사 몇 명을 교수형에 처하면서 위로하고 구호금을 베풀었다. 1473년 6월 22일에 나폴리 국왕의 딸인 엘레오노라가 페라라의 에콜 공작과 결혼하기 위해 행렬을 이끌고 피렌체를 지나자 이들을 환영해 하객으로 참석했다. 1474년에 대주교 [[피에로 리아리오]]가 사망하면서 처남인 [[리날도 오르시니]]를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이 피렌체 공화국 내의 성직 임명에는 시뇨리아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약속을 어겨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 대주교로 삼자 토스카나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밀라노와 베네치아와 동맹을 제안했다가 나폴리에서 그 연합이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구심을 느끼게 해 나폴리와 교황의 사이만 공고해졌다. 1478년 4월 26일에 교황과 공모한 '''파치 가문의 음모'''로 암살당할 뻔 하지만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동생인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었기 때문에 줄리아노의 정부 피오레타 고리니가 얼마 안 가 사망하자 줄리아노의 아들인 줄리오([[클레멘스 7세]])를 입양했으며, 피렌체인들이 공모자들에게 심하게 보복한 것으로 [[교황청]]과 대립해 파문과 성무 정지령을 받았다. 교황이 나폴리의 원조를 받아 전쟁을 하게 되자 피렌체에 역병이 창궐하거나 전쟁으로 인한 과다한 세금으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으며, 또한 영국인들이 옷을 자급자족해 모직 수입이 중단되어 피렌체의 경제가 쇠퇴하자 나폴리에 가서 나폴리 법정에 서기로 한다. 나폴리의 대사로 나폴리에 도착하기 전에 나폴리 법정과 비밀리에 교섭해 환영받을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1479년에 크리스마스 직전에 나폴리에 도착해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나폴리)|페르디난도 1세]]와 평화 협정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지만 잘 되지 않아 10주 만에 떠나게 되는데, 페르디난도 1세가 서둘러 평화 협정서를 만들어 보내면서 전쟁을 끝내 나폴리와 동맹을 맺게 된다. 비록 극적으로 전쟁은 막았지만 칼라브리아 공작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거나 교황 [[식스토 4세]]의 주장에 따라 투옥된 파치 가문의 사람들을 풀어주게 되는 등 손해를 보게 된다. 1480년 3월에 피렌체로 돌아와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핑계로 발리아를 소집해 5년 임기의 7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8월에 오스만의 군대가 오트란토에 상륙해 나폴리를 지나 로마를 향해 북으로 지나겠다고 협박하자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로부터 토스카나 지방 마을을 되돌려받았다. 오스만 군대의 위협으로 이탈리아가 위험해지자 교황 식스토 4세가 이탈리아 국가들끼리 싸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 대표단을 보내 12월 3일에 로마에서 교황의 사과를 받았다. 1484년에 식스토 4세가 사망해 [[인노첸시오 8세]]가 교황이 되자 촉새와 교황이 좋아하는 포도주, 값비싼 피렌체 직물, 편지 등을 보내 교황의 신임을 얻었다. 148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성직에 들어서기 전에 가진 아들 중 하나인 [[프란체스케토 치보]]와 로렌초의 딸인 마달레나가 혼인하자 [[지참금]]을 마련하면서도 치보에게 피렌체의 파치 궁과 몬투지의 파치 별장을 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